LifeLover - Pulver

2020. 9. 13. 23:25낡은 전축의 음악 - 록, 헤비메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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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스웨덴의 아방가르드 디프레시브 블랙메탈 밴드 Lifelover는 2005년 결성하여 2011년 해체될 때까지 (물론 2015년, 유명을 달리한 멤버 'B'(Nattdal)를 제외하고 잠시 뭉쳤지만...) 햇수로 7년간의 그다지 길지 않은 활동기간동안 확실한 족적을 새기고 간 밴드이다.

​개인적으로는 이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이들의 명반이라 일컫는 Erotik, Konkurs 등을 쉬이 구할 수 있었지만 언제나 뒷전으로 밀어놓았었다. 그 이유는 바로 그 2, 3집을 듣기 전 이들의 1집인 2006년작 Pulver를 먼저 손에 쥐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밴드가 나에게 있어서 굉장히 높은 순위의 위시리스트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가끔씩 그 Pulver를 찾아보게 되었었고 그렇게 문득 생각이 날 때마다 바로 지척에서, 혹은 얼마전에 국내에 중고로 나왔다가 사라진 적이 적잖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언가 참 타이밍이 안 맞는구나..."싶었던 그 때, 그래서 난 더욱 Erotik, Konkurs를 외면했었던 것이다.

​사실 이 Pulver를 그렇게나 먼저 듣고 싶었던 것은 앨범 자켓 때문이었다. 물론 이 Pulver의 앨범 자켓이 주는 그런 충격이 일반적으로 어떻게 다가올지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굳이 변명을 하자면 "외설"보다는 "관능"으로, "에로틱"보다는 "아름다움"으로, 그리고 그 푸른 이끼와 돌, 잔디 등의 싱그러운 자연 속에서 선명하게 대비되는 여체와, 그 여체에서도 더욱 선명하게 대비되는 붉은 피의 색채가 주는 언밸런스가 들려줄 음악이 너무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메탈킹덤을 통해 손에 쥔 이 앨범은 참으로 먼 시간을 돌아 왔다는 느낌을 주었다. 이미 인터넷을 통해 버전별로 샅샅이 본 인물이건만 막상 손에 쥐고 나니 드는 감정은 역시나 "소유욕"이 주는 뿌듯함이 더해진 만족감이다.

​음악을 듣노라니, 적어도 이들의 장르명에 소개된 '아방가르드'에 있어서 납득이 간다. 2006년이라면 블랙메탈도 상당히 다양한 갈래를 쳐 나갈 때이다. 블랙 슈게이징이나 디프레시브 등으로, 일종의 '정통성'에서 벗어난,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정(감성)적인 부분을 더듬어 갈 때이다. 그 와중에 나온 이들의 음악이 그 사이에서 얼마나 뚜렷하게 느껴졌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듯 하다.

​사실 사악과 어둠을 떠나서 개인, 특히 이런 현대인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이 바로 이런 류의 음악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일까, 이 음악이 지금의 나에게 더 선명이 다가오는 것은 역시나 어떠한 '감정의 공유'가 이루어져서일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블랙메탈을 들으며 느끼는 감동, 만족감과는 다른 것이다. 내가 수많은 블랙메탈 앨범을 들으며 바이킹 갑옷을 입을 일도, 불을 뿜으며 쇠사슬을 철컹댈 일도, 피를 머리에 뿌리거나 검은색 후드를 입고 눈 밑에 검은칠을 할 일도 없겠지만, 적어도 그런 듯 한 감동과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 앨범이 주는 그런 기묘한 감성은 대리만족이 아닌, "also"나 "too"에 가까운 느낌이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나는 이 앨범을 아직도 이해하지는 못했다. 적어도 속지의 부클릿과 음악이 (가사는 논외로 하자. 스웨덴어다.) 이 아름다운 여성이 빨간 피를 온 몸에 뭍히고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과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지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샘플링에서 드러나는 아이들의 동요나 경쾌한 느낌등이 이 여성의 환상적인 곡선에 어떻게 스며들어야 할 지도 모르겠다.

다만, 현재 너무나 지친 상태, 희망이 딱히 보이지 않은 상태의 사회를 살아가는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 "이 세상의 모두가 원래 그런 것"이라는 뉘앙스의 음악이 주는 위로는 생각외로 대단하다. 그런 위로, 그리고 나 뿐만이 아니라는 안도감, 그것에 젖어든 나를 마지막으로 위로하는 것이 바로 그 자켓의 여성이다.

어찌보면 완전히 곡해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 결국 사람은 보이는대로 보고 들리는대로 듣고 느끼고 싶은대로 느낀다. 그런면에 있어서 내가 이 어울리지 않는 자켓과 음악을 100%에 가깝게 억지로 엮어서 위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또 다른 행운이 아닐까 싶다.

​아름다운 것에 눈을 돌리는 것이 가식이고,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 거짓이라면, 분명 나는 그런 사회 속에서 그런 일을... 아니, 적어도 그런 행동으로 일을 해 오고 있다.

그래서 이 앨범에 대해서라도 솔직하게 표현하려 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음악이다. '자켓처럼'은 아니더라도 '자켓만큼'이나.



*분위기 깨는 사족을 하나 달자면... 기타의 클린톤과 업템포의 곡을 듣다보면 묘하게도 블랙메탈을 서핑음악으로 패러디한 유튜브 영상들이 생각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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